삼국지 정사상의 일기토와 대장급들의 승부
삼국지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전투와 장수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나타냅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대 1 승부, 즉 일기토입니다. 일기토는 단순한 무력 대결을 넘어 각 장수의 개인적 역량과 명예가 걸린 중요한 승부였으며, 이는 각국의 군사력과 전략, 정치적 영향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몇 차례의 일기토가 묘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각국의 장수들이 겪은 치열한 승부를 엿볼 수 있습니다.
1. 여포와 곽사의 대결 (192년)
정사 - " 곽사와 여포는 더불어 싸웠는데 여포가 모(矛)로 곽사를 찌르자 뒤에 있던 곽사의 기병이 앞으로 와 곽사를 구했다. 이에 곽사와 여포는 각각 그만두었다. 여포가 이를 막지 못했고 마침내 이각 등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동탁이 죽은 후 60일이 지나 여포 또한 패하니, 수백 기를 이끌고 무관(武關)을 나와 원술(袁術)에게로 가려했다. "
192년에 발생한 여포와 곽사의 대결은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토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전투는 여포가 곽사를 상대로 싸운 일기토로, 두 장수의 능력과 전략이 중요한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당시 곽사는 동탁의 부하 장수였으며, 여포는 동탁을 살해한 뒤 그 권력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여포와 곽사는 일종의 동맹 관계에 있던 상태였으나, 결국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여포는 처음에 곽사를 모로 찔러서 위협을 가했지만, 뒤에 있던 곽사의 기병이 나타나 여포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잠시 싸움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장안으로 진입하려 했지만, 결국 동탁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여포 역시 패배한 후 수백 기를 이끌고 원술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결은 여포의 무용과 곽사의 방어가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사건으로, 그 당시 전투와 일기토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2. 손책과 태사자의 대결 (196년)
정사 - " 양주자사揚州刺史 유요劉繇가 태사자太史慈와 같은 군郡 출신(→동래군)이었는데 태사자가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온 뒤 아직 서로 만나보지 못하여 잠시 장강을 건너 곡아曲阿(→양주 오군 곡아현)로 가서 유요를 만나려다 아직 가기 전에 때마침 (유요를 치기 위해) 손책孫策이 도착했다. [1] 어떤 이가 태사자를 대장군大將軍 [2]으로 삼을 만하다며 권하자 유요가 말했다, “내가 만약 자의子義를 중용한다면 허자장 許子將 [3] 이 나를 비웃지 않겠소?” 다만 태사자를 보내 (적군의) 경중(輕重, 허실)을 정시(偵視, 정찰)하게 했다. 당시 홀로 기병 한 명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손책을 만났다. 손책을 뒤따르는 기병은 13명으로 모두 한당韓當, 송 겸宋謙, 황개黃蓋 같은 (오래된 용맹한 장수의) 부류였다. 태사자가 곧장 앞으로 나가 싸우며 바로 손책과 더불어 맞섰다.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태사자 목 위의 수극(手戟, 무기의 일종)을 붙잡아 빼앗자 태자사 또한 손책의 두무(兜鍪, 투구)를 빼앗았다. 마침 양쪽의 병기(兵騎, 보병과 기병)가 아울러 달려오니 이에 싸움을 풀고 흩어졌다. ------------------------------ [1] 손책의 도강과 강동정벌 시기 / 자치통 감고이 - 고이考異 왈, 삼국지 위서 무제 기와 원굉袁宏의 후한기後漢紀에서 모두 초평初平 4년(=193년)에 손책이 원술의 명을 받아 장강을 건넜다 하고, 후한서 헌제 기와 삼국지 손책전에서는 흥평興平 원년(=194년)이라 하고, 우부虞溥의 강표전江表傳에서는 손책이 흥평 2년(=195년)에 장강을 건넜다 했다. 안컨대 원술이 초평 4년(=193년)에 비로소 수춘壽春을 얻었고 손책전에 따르면 원술이 서주徐州를 공격하고자 하여 육 강陸康에게 쌀을 요구했다 하였으니 이 일은 필시 유비가 서주를 얻은 뒤일 것이다. 유요 전에서 오경吳景이 유요를 공격해 1년 여가 지나도이기도 못했다 하였으니(*손책전에 따르면 오경의 유요 공격 실패 -> 손책의 도강임) 곧 손책이 장강을 건넌 것은 흥평 원년(=194년) 이전일 수 없다. 이제 강표전에 의거하여 정한다. (*이에 따라 자치통감에서는 손책의 도강과 유요와의 전투를 흥평 2년(=195년) 조에 수록함) [2]大將軍 - 삼국지집해에서 노필은 여기서 大 또는 軍을 연자衍字로 봄.(將軍 or 大將) 자치통감에서는 大將으로 표기. [3] 허자장(許子將) - 허소許劭의 자字가 자장子將이고 여남군 평여현 출신으로 인물평으로 유명함. 후한서 허소전에 따르면 당시 유요에게 의탁하고 있었음."
196년, 손책과 태사자(태사慈)의 대결은 전투와 일기토의 또 다른 중요한 예시입니다. 손책은 당시 양주자사였고, 태사자는 유요의 부하였습니다. 유요는 손책이 공격하려는 대상을 정찰하기 위해 태사자를 보내게 되었고, 태사자는 손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즉각 1대1 승부를 벌였으며, 손책은 태사자의 무기를 빼앗으며 승리한 듯 보였으나, 이후 양측의 병력들이 싸움에 끼어들면서 결국 싸움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대결에서 손책은 승리한 듯했으나, 태사자는 손책의 두무(투구)를 빼앗아 갔다는 점에서 일부는 태사자가 물러서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은 손책이 전략적인 승리를 거둔 예로 기억되지만, 결국에는 일기토가 양측의 군사들에 의해 중단되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누가 더 강했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3. 마초와 염행의 싸움 (196년)
- 정사 " 위략에 의하면 : 염행(閻行)은 금성군 사람이며, 나중에 이름을 염(豔)이라 하였고, 자는 언명(彥明)이다. 젊어서 건장하다는 명성이 있었기에, 일찍이 소장(小將)이 되어 한수를 따랐다. 건안 초, 한수와 마 등이 서로 공격했다. 마 등의 아들 마초 또한 건장하다고 칭해졌다. 염행은 일찍이 마초를 찔렀는데, 모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다."
마초와 염행의 대결은 한수와 마등의 대립 속에서 발생한 중요한 일기토였습니다. 마초는 당시 건장하다는 명성을 얻었고, 염행은 마초를 직접 찌르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염행은 마초의 목을 거의 자를 뻔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마초는 이후 염행의 공격을 피하며 승리를 거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그 자체로 마초와 염행이 가진 강한 전투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마초가 이후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한 전투였습니다. 마초의 강함과 염행의 용맹은 당시 군사적 균형을 뒤흔들었으며, 이는 이후 전투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4. 관우와 안량의 대결 (200년)
- 정사 " 건안建安 5년, 조공曹公이 동쪽으로 정벌하여, 선주先主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이 관우關羽를 잡아서 돌아와, 벼슬을 내려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으니, 예가 매우 두터웠다. 원소가 대장군大將軍 안량顔良을 파견하여,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게 하니, 조공이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그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가 안량의 의장기와 일산日傘을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 많은 무리 안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은 당해낼 수 있는 이가 없어,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이 곧 표表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 후漢壽亭侯에 봉했다."
관우와 안량의 대결은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토 중 하나로, '백마에서의 전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공의 정벌을 받은 원소는 안량을 보내어 조공의 부대를 공격하게 했으며, 관우는 이 공격을 막기 위해 선봉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관우는 안량의 의장기와 일산을 멀리서 보고 그를 직접 찔러 죽였습니다.
이 대결은 관우의 전설적인 능력을 입증하는 사례로, 그의 충성과 무용이 강조된 전투였습니다. 관우는 당시 백마에서 안량을 처치하고 돌아오면서 큰 명예를 얻었으며, 이후 그에게 '한수정후'라는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이 대결은 단순한 일기토가 아니라, 관우의 전투 능력과 명예를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5. 곽원과 방덕의 대결 (202년)
- 정사 " 건안연간, 태조가 여양에서 원담, 원상을 토벌하자, 원담은 곽원, 고간 등을 보내어 하동군을 공략케 하였다. 태조는 종요로 하여금 관중의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이를 토벌케 하였다. 방덕은 마 등의 아들 마초를 좇아 평양에서 곽원 고간과 대치하였는데, 방덕은 군의 선봉이 되어, 나아가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직접 곽원의 목을 베었다. "
곽원과 방덕의 대결은 건안 연간, 원담과 원상의 토벌에 이어 발생한 전투입니다. 방덕은 마초의 아들로, 당시 곽원과 고간을 상대하기 위해 선봉에 섰습니다. 방덕은 이 대결에서 크게 승리하며, 직접 곽원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는 방덕의 용맹함과 전략적 능력을 입증하는 중요한 승리였으며, 이후 방덕은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방덕은 이후 군의 선봉으로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의 전투 경험과 전략은 다른 장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방덕은 단순히 개인적인 승리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는 이후 방덕의 군사적 입지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여몽과 진취의 대결 (208년)
- 정사 " 황조黃祖를 정벌하는데 종군했는데, 황조가 도독都督 진취陳就에게 역격하도록 해 수군으로 출전했다. 여몽이 선봉을 거느렸는데, 몸소 진취의 목을 베어 매다니, 장사들이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공 했다. 황조가 진취의 죽음을 듣고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 병사들이 추격해 그를 사로잡았다. 손권이 이르길 : “일이 이루어짐은, 진취가 먼저 잡혀서이다.” 여몽을 황야중랑장橫野中郎將으로 삼고, 전錢 천만을 하사했다."
여몽과 진취의 대결은 황조를 정벌하던 중 발생한 전투입니다. 진취는 황조의 부하로, 여몽의 선봉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여몽은 진취의 목을 직접 베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손권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는 중요한 전투로, 이후 여몽은 황야중랑장으로 임명되고 전재를 하사받았습니다.
여몽의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그가 손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전투는 동오의 군사적 승리뿐만 아니라, 여몽이 중요한 군사 지도자로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
정사 삼국지에서의 일기토는 단순한 1대 1 승부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승부들은 각 장수의 개인적인 명예를 걸고 싸운 것이지만, 그 결과는 전체 군사적,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포와 곽사, 손책과 태사자, 관우와 안량, 방덕과 곽원, 여몽과 진취 등 여러 장수들의 대결은 각국의 군사적, 전략적 입지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각국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승부였으며, 오늘날에도 그들의 전투는 많은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Tip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독도문제정리 일본측 주장이 틀릴수 밖에 없는 이유 (2) | 2023.02.19 |
---|---|
한국사-일본이란 국호를 처음 쓴 나라는 우리나라의 백제였다. (0) | 2023.02.18 |
삼국지에서 손책과 주유의 만남 - 정사의 실제 모습 (0) | 2023.02.18 |
기생수: 인간과 기생 생물 사이에서의 갈등과 상호 이해 (0) | 2023.02.14 |
밸런타인데이: 특징, 유래, 선물의 의미, 나라별 반응 (0) | 2023.02.09 |